결국 비행기를 놓쳤다.
살면서 비행기를 놓칠 거란 생각 조차 안 하고 살아와서 그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고 내 자신이 바보같고 우울했다. 바보같이 열차를 놓친 게 한심하고 후회스러웠다. 일단 공항 의자에 앉아 비행기 표를 찾아보는데 그냥 짜증나고 다 귀찮아서 관두고 일단 노부상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내가 '비행기.. '하자마자 비행기 탔냐고 묻길래 못 탔다고 대답 하니 뭐?????????하고 놀라면서 엄청 박장대소를 했다. 난 그때 마음 심란한데 왜 웃냐고 짜증을 냈다. 그랬더니 노부상은 '정말 너의 인생은 재미있어' 라고 했다. 이때 뭔가 제정신이 아니라 말도 잘 안 나오고 한국말로 계속 뭐라 지껄였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그때 내가 타지에서 전화할 수 있는 현지인이 있다는 게 너무 안심되고 다행스러웠다. 노부상과 통화하고 나니 답답했던 마음이 좀 풀려서 에이 뭐 지나간 일 어쩌겠냐 하고 공항 의자에 앉아 모몬도로 새로운 비행기표를 찾았다. 처음에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표를 찾다가 문득 이왕 이렇게 된 거 여행시간 더 벌었다 생각하고 좀 더 머물자 하는 생각이 들어 그냥 3일 후 저녁 비행기를 예매했다. 다만 급한 마음에 결제부터 하고 나니 문득 내가 잘 예매한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중에서야 표 예매한 사이트가 중국사이트라는 것을 알게 됐다. 메일로 온 부킹 확인서를 유심히 읽다가 그냥 직접 확인하는 게 낫겠다 싶어 셔틀을 타고 1터미널에 갔는데 재수없게도 항공사 부스가 닫혀있었고 결국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 전화로 예매확인을 했다. 이 날 친한 주변사람들이 예매 확인도 해주고 돈 부족하면 말 하라하고 너무 많이 도와줘서 감동받았다. 착하게 살아야지. 물론 잘 안 되겠지만.
비행기표를 사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고 긴장이 풀려서 공항을 노숙자처럼 누비며 빵 사먹고 스이카도 충전하고 유심도 새로 샀다. 하지만 해결하지 못 한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어딜 가야할지 정하지 않았다는 것. 도쿄는 가고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멀리 가기엔 시간도, 숙소도 돈도 부족했다. 그렇게 한참을 어디가나 고민하다 결국 키사라즈에 가기로 마음 먹고 바로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찾았다. 근데 역시 키사라즈 쪽은 숙소가 많지 않았고 그나마 있는 것도 다 예약이 돼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 키사라즈역에서 가까운 숙소를 발견하고 그냥 무대뽀로 예약요청을 넣었다. 그때가 거의 저녁 일곱시였다. 주인에게 메세지가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11분이 지나고 15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똥줄이 타서 메세지를 한 번 더 보냈다. 그래도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앆고 나는 또 답 없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밖에 나가 평소 잘 하지도 않는 줄담배를 태웠다. 그렇게 몇 분을 더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데 드디어 집주인에게 답장이 왔고 자기가 지금 대만에 있으니 9시에 돌아오는 남동생에게 체크인을 맡겨도 괜찮냐는 내용에 호ㅜㄹㅇㄹ로로로로!!!당연히 됩니다!!!하면서 바로 전차를 타러 내려갔다.
나리타에서 키사라즈 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jr을 타고 치바에서 내려 전차를 갈아타고 키사라즈에서 내려 쿠루리선으로 또 한 번 갈아타야 하는 꽤 먼 여정이었다. 하지만 나리타에서는 신주쿠 가는 것도 족히 한 시간이 걸리니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존나 괜찮지 않았다. 키사라즈역까지 가는 일은 순탄했지만 쿠루리선을 타고 다른역에서 내려 집을 찾아가는 게 문제였다. 심지어 이때 휴대폰 배터리가 5%밖에 남지 않아서 급하게 수첩을 꺼내 그 집의 약도와 주소를 옮겨적었다.
쿠루리선을 타고 숙소가 있는 어쩌고카와 역에서 내렸는데 주변에 진짜 완전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길이 없어서 전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철도 위를 걸어서 집에 갔다. 무슨 50년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난 철도 위를 걷는 게 뭔가 무서워서 일단 역 출구를 통해 도로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중에 그걸 엄청 후회했다. 그냥 그 사람들 따라갈 걸 내가 뭘 안다고 시발시발 하면서..
구글맵을 보면서 집의 위치를 찾는데 걸을 수록 자꾸만 더 집에서 멀어져갔다. 역사 반대편으로 넘어가야하는데 거길 넘어갈 길이 없었고 난 혹시나 앞으로 더 가다보면 반대편에 갈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싶어 계속 걸어갔다. 근데 뻥안치고 온통 풀밭만 있고 심지어 깜깜해서 앞도 안 보였다. 배터리가 없어서 플래시도 켤 수 없었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 아까 그 사람들처럼 철길을 타고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깜깜한 철도 위를 걸어가는데 뭔가 발 밑에서 삐걱 소리가 나서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고, 발 밑을 확인했다. 철도는 무슨 외나무 다리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고 자칫하면 발이 빠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심지어 그 밑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걸 보니 온 몸에 소름이 싹 끼쳤고 너무 무서워서 무슨 인디아나 존스처럼 철도를 거의 기어가듯 엉금엉금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정도 걸어갔는데도 역 건너편에 넘어갈 수 있는 길이 나오지 않았다. 위기감을 느껴서 결국 이판사판으로 어두운 풀숲을 지나 담 비슷한 걸 넘었는데 풀 밑에 흙이 엄청 깊에 파여있어서 살인의추억 한 장면처럼 비명을 지르고 풀밭을 굴렀다. 이때 정말 너무 지쳐서 내가 지금 일본에 온 건지 밀림에 온 건지 분간이 안 가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보니 배터리가 1%밖에 남지 않았고 나는 미친듯이 집이 있는 방향을 따라 뛰었다. 하지만 휴대폰은 끝내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결국 수첩에 그려 둔 약도를 보며 길을 찾는데 정말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사람도 없고 가로등도 없어서 무서워 미칠 것 같았다. 스스로 모험심 강하고 겁도 없다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 순간만큼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무서웠다. 그리고 그 길을 약도 하나만 보고 찾아낸다는 건 완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 자포자기 한 채 터덜터덜 길을 걷는데 저 멀리서 시바견을 산책시키는 아주머니 한 분이 보였다. 난 거의 사막에서 오아시스 발견한 듯 그 아주머니에게 달려가 내가 지금 집을 찾고있는데 폰도 꺼지고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도와달라 하고 거의 울먹거리며 이야기했더니 아주머니가 주소나 약도가 있다면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나에게 일단 집에서 휴대폰을 가져올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정말 너무 고마웠다.
아주머니는 곧 집에서 휴대폰을 가지고 나왔고 아주머니 폰으로 그 집 위치 찾아 길을 걸었다. 그러다 그 주소로 보이는 집에 다다랐고 초인종을 눌러댔다. 근데 씻는 중인지 집에서는 샤워소리가 나고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아주머니는 왠지 이 집이 아닌 것 같다며 내려가자 했고 나에게 집 사진이나 집주인 연락처를 아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당연히 알고있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그럼 자기 집에서 휴대폰 충전하고 집주인에게 먼저 연락해보자 했고 진짜 그 순간 아주머니가 천사로 보이는 동시에 너무 죄송하기도 했다.
결국 아주머니 집에 가 충전을 했는데 그 집 가족들이 나를 보고 깜짝놀라며 아주머니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가족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는 너무 뻘쭘하고 미안해서 거의 몸이 오징어처럼 오그라져있었다. 그 와중에 그 집 개가 나를 신기하단듯이 계속 쳐다보는데 너무 귀여워서 사진을 찍고싶었지만 남의 집에서 신세지고 있는 와중에 개 사진 찍어대는 게 영 철딱서니가 없어보여서 그만뒀다.
폰을 어느정도 충전하고 집주인에게 연락해 다시 아주머니와 집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숙소로 보이는 집을 드디어 찾았고 아주머니가 자긴 초인종 눌러보고 이 집이 맞으면 그때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초인종 눌렀더니 집주인의 남동생이 나왔고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그때 그 아주머니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정말 케이크라도 사다가 선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집은 지은지 얼마 안 되서 진짜 깨끗했고 무엇보다 나 혼자 방을 쓸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스윗 홈!!!!!!
집주인의 남동생 이름은 차오였고 대만사람이었다. 에어비앤비 소개가 중국어로 돼 있어서 좀 걱정했는데 다행히 일본어를 잘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에반게리온 티셔츠를 입고있었다. 방에 짐을 풀고 침대에 뻗어있는데 차오가 올라와 밀크티 있는데 마시겠냐고 물어서 좋다고 한 뒤 거실에 내려갔다. 거실에 앉아 차오와 대화를 나누는데 대화가 꽤 잘 통했다. 정말 여러가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차오가 나에게 일본 문화를 좋아하냐고 묻고 일본 영화나 만화나 음악같은 걸 좋아한다고 말한 뒤 에반게리온 좋아하냐고 물어봤다. 차오는 좋아한다고 말 하면서도 뭔가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고 이야기 흐름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왠지 오타쿠로 보여지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았다(그 전에 티셔츠가 에반게리온이지만). 모처럼 같은 오덕끼리 에반게리온 얘기하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웠다.
근데 웃긴 건 나중에 차오가 폰으로 뭐 보여준다고 자기 휴대폰 패턴을 풀었는데 폰 바탕화면이 러브라이븤ㅋㅋㅋㅌㅌㅌㅌㅌㅋㅋ 이런 시밤 애니로 일본어 배웠다고, 처음 배운 일본어가 오마에오 코로스 이딴 거라고 왜 말을 못 해!!!!!!!!!!!!!!!
암튼 차오랑 얘기하는 게 너무 웃기고 재미있기도 했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는 게 귀찮기도 해서 방을 하루 더 연장하기로 했다.
'개털기'에 해당되는 글 199건
- 2017.09.04 키사라즈
- 2017.09.03 스티븐
- 2017.09.03 에노시마
- 2017.09.02 가마쿠라
- 2017.09.01 도쿄
- 2017.08.16 하루가 길다
- 2017.08.06 미운놈 생각나게 하는 노래
- 2017.07.31 이렇게 올해 지산도 끝
- 2017.07.30 삑사리
- 2017.07.06 숟갈
일본 도착한 날 만난 스티븐이란 놈에 대해 써보려 한다. 왜냐면 걘 내가 최근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미스테리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실 공항가는 기차 안에서 지난 여행을 곱씹으며 여유롭게 적으려 했으나 나의 병신짓으로 지금 비행기 놓칠 위기에 처해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씀.
가마쿠라 넘어가기 전 토다이 근처에 잡아놓은 숙소에 도착했는데 시간이 벌써 밤 9시였다. 집주인은 없고 그 집에 같이 살고있는 남자만 있길래 그 사람에게 자리를 안내받고 잠깐 얘기를 나눴다. 그 사람 이름은 마코토였고 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이었다. 근데 서로 대화하는 내내 너무 어색해서 손발이 달팽이처럼 오그라들 뻔 했다. 그 사람도 날 되게 어색해 했지만 게스트를 그냥 두고 가 버릴 수 없다는 사명감이 있는건지 계속 내 앞에 서서 이야기 할 거리를 찾아댔다.
그러다 나에게 자기 좀 이따가 스티븐이라는 미국인이랑 술 마시러 갈 건데 같이 갈 의향이 있냐고 물어서 나는 뭐 가도 되고 안 가도 되고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 했는데 그 사람이 그럼 알았다며 방을 나가버렸다. 그때 그 사람이 내가 한 '전 괜찮아요'라는 말을 간다고 받아들인건지 됐다고 받아들인 건지 헷갈려서 이도저도 못 한 채 침대에 한참 앉아있었다. 그러고 한 15분 지났을 때 마코토가 덩치 큰 백인 남성과 함께 내 방 앞으로 왔다. 마코토는 그 남자가 바로 스티븐이라고 했다. 스티븐은 내가 인사를 하자 눈은 스마트폰을 본 채 손을 허공으로 한 번 휙 저었다. 더럽게 시크한 놈이었다. 거기서부터 쟨 좀 이상한 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스티븐은 일본에서 3개월을 지냈는데 그 3개월 동안 다른 지역은 한 번도 안 가고 오직 도쿄에서, 그것도 토다이 앞에서만 움직였다고 한다. 외국인인 것만 아니면 그냥 할 일 없는 동네주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마침 그 날은 스티븐이 일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고 다음날 한국에 가 또 1개월을 보낸다고 했다.
셋이 숙소를 나와 이자카야를 찾아가는데 나한테 눈길 한 번도 안 주던 스티븐 놈이 대뜸 손을 내밀며 '하쥐메마쉿테 왓타쉬와 스티븐테쑤' 했다. 그래서 나도 내 이름을 말 해주고 서로 악수를 했는데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또 스마트폰만 쳐다봤다. 한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스티븐이 땅바닥을 가르키며 '와치 아웃!!!!!'이라 외쳤다. 누가 오바이트 해 놓은 거 밟지말라고 소리친 거 였는데 그걸 보고 스티븐 혹시 츤데레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돌아올 때 그 행동을 또 했다.
술집에 도착하고 이것저것 시킨 뒤 앉아있는데 레알 셋이 어색해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 순간 내가 왜 이 술자리에 왔을까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스티븐은 느려터진 포켓 와이파이와 계속 싸움하느라 우리랑 대화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행히 좀 있다 마코토가 부른 친구 한 명이 도착했고(휴대폰 계속 만지던데 어색하니까 빨리와라 메세지 한 듯) 그 사람은 다행히 여자였다. 그 여자 친구를 보니 나는 너무 숨통이 트이고 기뻐서 여자가 오자마자 말을 걸어댔다. 여자의 이름은 아이리였다. 아이리가 오자 분위기가 밝아졌다. 스티븐과 아이리는 서로 면식은 있지만 친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았는데 아이리는 영어를 전혀 못 하고 스티븐은 일본어를 전혀 못 해서 중간에 마코토가 통역을 해 주거나 스티븐이 휴대폰 번역어플을 보여주거나 여러가지 시도가 있었지만 전혀 말이 안 통했다.
그리고 숙소 밑에 와인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거기 안 가고 굳이 멀리 떨어진 선술집에 간 이유는 스티븐이 일본 전통주를 마시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걘 가자마자 맥주를 두 잔 비운 뒤 바로 사케를 시켰는데 한 입 먹더니 표정이 완전 개썩어서 다들 웃었다ㅋㅋㅋ 진짜 무슨 구정물 마신 듯한 표정이었다. 사케는 더 못 마시는겠는지 무슨 이상한 트로피칼 음료를 시켜 지 혼자 쭉쭉 빨아마셨다.
마코토가 스티븐에게 한국 간 다음 또 어디 가냐했더니 태국에 가서 다시 1개월을 보낸 뒤 겨울에 아빠 결혼식이 있어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내가 한국가면 어디갈거냐 물었더니 걘 서울과 부산에 갈 거라고 했다. 그래서 서울가면 어디갈거냐니까 '아무데나'라고 말한 뒤 갈 데 있으면 추천해달라했다. 사실 나도 서울 살지만 서울에 대해 딱히 몰라서 인사동을 추천해더니 자기 휴대폰의 구글맵을 켜서 인사동을 검색해달라 했다. 근데 와이파이가 더럽게 느려서 곧 포기했다. 스티븐이 일단 서울가면 혼긱에 간다고 하길래 '홍대 말하는거지? 그거 혼긱아니고 홍익이야' 했더니 졸라 홍익이라고 말 할 시도조차 안 한 채 '어 나 혀가 이상해서 안 돼'하고 아주 지멋대로 굴었다. 그리고 다시 내가 할 수 있는 한국말 있냐고 묻자(지금 생각해보니 일본에서 3개월 지내고도 일본어 모르는 놈한테 한국말 아냐고 물어 본 내가 더 이상함) '줸줸' 이랬다. 한국인은 영어로 물어보고 미국인은 일본어로 대답하는 그 상황이 너무 이상한데 웃겼다.
시간이 좀 더 지나서 집 주인과 나머지 친구들이 합류해 총 7명이 되었고 완전 술판이 벌어졌다. 여기서 웃긴 일이 또 있는데 그 집 주인도 진짜 기인이었다. 그 사람은 무슨 훈도시부?라는 모임의 회장 격인 사람이었다. 근데 생각보단 모임 규모가 큰 것 같았다. 아무튼 그래서 매일 훈도시만 입고 다니는데 그 날도 훈도시만 입은 채 술집에 왔다. 사실 숙소 예약할 적에 그 사람 에어비앤비 프로필사진 보고 얘 뭐냐 싶었는데, 숙소 예약하고 며칠 뒤 칸쟈니 크로니클에 그 사람이 나왔다ㅋㅋㅋㅋㅋㅋㅋ 길거리 다니다 그냥 눈에 띄는 사람 인터뷰하는 거였는데 보고 너무 놀라서 거기 가면 말 해줘야지 생각하고 있었고 가서 그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해 줬다. 근데 되게 당연하단듯이 그래?!맞아 나 티비나옴! 하고 떡꼬치를 겁나 먹어댔다. 사실 그 사람 오기 전에 아이리와 마코토에게 먼저 그 얘기를 해 줬는데 그 둘은 엄청 깜짝 놀라면서 처음 들었다고 웃기다고 했다. 아무튼 그 사람도 좋은 의미에서 격식도 없고 자유로운 멋진 또라이였다.
근데 사람이 많아질 수록 친한 애들끼리만 놀아서 나랑 스티븐은 쩌리가 되었고 난 너무 피곤하고 재미없어서 빨리 숙소에 돌아가고 싶었다. 스티븐은 지루해하는 나에게 '아무나 너한테 말 걸어줬음 좋겠어'라고 했는데 이새낀 내가 지한테 말 걸면 뻘쭘하게 단답으로 답하거나 씹으면서 뭔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나 싶었다. 지가 말 걸기는 귀찮으니까 그런건지 하여간 이상했다.
난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고 원래 친구인 사람들은 지들끼리 신나고 스티븐은 끊임없이 뭘 주문해서 혼자 먹고 분위기가 개판이었다. 근데 스티븐 그 와중에 뜬금포로 츄러스를 시켜서 지 혼자 겁나 맛있게 먹어댔다. 아 이거 쓰면서도 나 혼자 웃고있음. 그냥 츄러스도 아니고 예쁜 접시 위에 초코시럽이랑 생크림 올라간 카페에서나 팔 법한 걸로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걸 보고 타카시(집 주인)가 엄청 크게 '헐 쟤 엄청 미국인같아!!!!!!!!!'라고 했는데 스티븐은 그걸 또 '츄러스 스페인거임'하고 맞받아쳤다. 나는 졸다가 그 모습응 보고 진짜 엄청 웃었다. 심지어 얘는 츄러스 먹고 트로피컬 어쩌고 하는 핑크색 음료를 시켜 지 혼자 벌컥벌컥 마셨다. 스티븐이 잠깐 화장실 간 사이 일행 중 한 명이 '쟤 부자같지?'했는데 다들 그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 추측은 사실이었다.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술값이 몇 만엔 나왔는데 그걸 지가 그냥 카드로 긁었다. 그것도 존나 시크하게 '나 집에 5천 달러 든 금고 또 있으니까 상관없음' 하면서. 금고는 구라여도 돈은 진짜 많은 것 같다. 마코토는 스티븐에게 내가 한국 가는 날 까지 기다렸가다 같이 가라고 했는데 농담인 거 알면서도 겁나 싫었다. 내 말 백프로 씹을 거니까.
아무튼 스티븐 자식 무슨 오타쿠같은 그림 그려진 한국 가이드책 보여주면서 민망해하던데 괜히 들켜서 오바하고 귀여운 면도 있었다. 한국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겁나 웃길 것 같다.
일본에 온 뒤로 제대로 된 밥을 못 먹고 계속 술만 마신 탓인지 위가 빨래 쥐어짜듯 아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선잠을 자고 아침부터 깨 있었는데 비가 계속 왔다. 하지만 휴대폰 날씨 어플엔 낮부터 맑을 거라고 나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노부상과 만나기로 한 낮 세시까지 시간이 남아 여유롭게 침대에 누워 음악도 듣고 창 밖 날씨도 감상하다가 1시 쯤 느즈막이 일어나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숙소에서 역까지 좀 걸어야 해서 일찍 나가야 됐는데 늦장부리다 지각할 것 같아 슬리퍼 신은 채로 하세역까지 파워워킹을 했다.
다행히 제 시간에 맞춰 갔는데 노부상은 누가 일본인 아니랄까 봐 단 1분의 오차도 없이 딱 세 시에 맞춰 도착했다. 좀 무서웠다.
노부상과 같이 에노덴을 타고 밖의 풍경도 감상하며 이야기도 하며 엄청 좋은 날씨에 서로 끊임없이 극찬을 날렸다. 정말 언제 태풍이 불었냐는 듯 아주 미친듯이 뜨겁고 화끈한 여름 날씨였다. 나는 늘 뜨거운 태양열에 반응하기 때문에 피곤한 상태에서도 기분이 겁나 좋았다. 치바는 계속 비가 내리고 추웠다고 한다.
요일 개념이 사라져서 전차에 사람이 왜 이리 많나 했는데 토요일이었다. 에노시마역에 내렸더니 완전 사람들로 인산인해였고 내가 생각한 것 보다 주변에 가게가 엄청 많아서 놀랐다. 역시 관광지는 관광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부상도 에노시마는 처음이라 나처럼 신기해했다.
사람들을 따라 걷다가 노부상이 나에게 한국어 인삿말을 물어봐서 '안녕'이라고 알려주었는데 이게 이번에 일본에 와서 내가 처음 쓴 한국말이었다. 노부상은 가타카나로 쓸 수 있는 내 이름 조차 잘 발음 못 할 정도로 한국말을 아예 모르는데, 유일하게 알고있는 단어가 '오빠'라고 했다. 내가 그 말은 어디서 들었냐고 했더니 전에 간 식당에 한국인 커플이 있었는데 여자가 자기 남자친구 팔을 겁나 세게 때리면서 '오빠!!!!!'라고 하는 걸 들었고 그게 무슨 뜻인지는 전혀 모른다고 했다. 뭔가 기본적으로 일본남자들이 그 단어에 굉장히 흥미있어 한다는 걸 알아챘다.
에노시마에 들어가서 전 날 다이상이 알려줬던 전망대와 신사에 올라갈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 티켓을 구입했다. 내가 에스컬레이터를 가르키며 노부상에게 '어제 다이상이 말한 그거다'했더니 자기는 걔 말 맨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데 너는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고 있냐고 개털이 역시 착하구나 라고 말했다. 그런 노부상에게 다이상 재미있고 좋은 사람인데 불쌍하다며 착한 척 쿠사리 맥였다. 근데 한 편으론 케이블카나 엘리베이터도 아니고 에스컬레이터 별 것도 아닌 걸 돈 받네 싶었다. 진짜 아무것도 없는 완전 평범한 에스컬레이터이기 때문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신사에 올라가 돈 넣고 기도하는 뭐 그것을 했는데 노부상이 기도하기 전 여러 의식?같은 것에 대해 알려줘서 그대로 보고 따라한 뒤 완벽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일본인 대부분이 그런 것 같지만 노부상은 자기가 신에 대한 믿음이 좀 강한 편이라 말 했다. 근데 자기 집 바로 앞에 신사가 있고 어릴 때부터 거기서만 늘 기도를 드려서 다른 신사에서 기도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자기가 기도 드리는 신이 화낼 거라고 혼자 두려워했다. 그러더니 아주 잠깐 날이 흐렸던 순간에 와 역시 신이 화냈어 ㄷㄷ거렸다. 난 종교도 없고 일본 신에 대한 지식도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잘 이해가 가진 않았다.
기도를 하고 그 옆에 가서 오미쿠지를 뽑았는데 나는 대길+개구리가 나오고 노부상은 중길+거북이가 나왔다. 근데 그 거북이를 보고 노부상이 겁나 질색하며 마지막으로 자기가 오미쿠지 뽑았을 때 거북이가 나왔다며 너무 무섭다고 했다. 난 말하고 듣기만 가능한 문맹이라 노부상이 내가 뽑은 운세를 일일이 다 읽어주고 어려운 단어도 설명해줬다. 사실 한자 옆에 후리가나가 달려있어 아예 못 읽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누가 읽어주는 게 훨씬 빠르기 때문에 그냥 히라가나 모르는 척을 했다.
내 운세에는 위만 보지말고 먼저 기반을 닦아라 뭐 이런 내용이 쓰여있었는데 노부상은 이걸 진짜 하루죙일 내가 뭔 얘기를 할 때 마다 반복해서 열 번도 넘게 말했다. 참고로 노부상의 운세엔 마음이 강하지 못 하다고 써 있었는데 이것도 한 다섯 번 얘기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운세가 되게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노부상의 연애운에 곧 사랑하는 상대를 발견할 것이다 그런 내용이 있었는데 바로 나를 가르키며 응! 니 얘기네! 했다. 이것도 드럽게 속 보이는 말이었지만 뭔가 어제 술자리에서 했던 것과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전망대는 그냥 전망대였는데 날씨가 좋아서 아주 먼 곳까지 보였다. 전망대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노부상은 한 편으로 날 어여삐 여기는 것 같았다. 그건 서로 살아온 환경이나 가치관은 달라도 내가 살면서 겪은 시련의 유형이나 고민들이 자기 옛날 모습과 똑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이런 말은 나보다 조금 연상의 인간들에게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많이 들어왔지만, 확실히 노부상이 과거에 겪은 일들과 현재 내가 갖고있는 어려움들이 상당부분 일치했다. 어제 노미카이에선 좀 까불대고 되는대로 사는 사람 같았는데 이렇게 보니 확실히 어른은 어른이구나 싶었다.
거기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전망대 오기 전 대기표 뽑아놓은 팬케이크 집에 갔다. 거기가서 뜬금포로 팬케이크를 먹은 이유는 전 날 다이상이 거길 추천해줬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난 다이상이 그런 말 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아까 노부상에게 다이상 왜 무시하냐고 혼냈는데 사실 내가 무시했네 ㅈㅅ했다. 근데 노부상 말로는 다이상이 여기 팬케이크 겁나 크다고 했다던데 알고보니 그릇만 쓸데없이 크고 빵은 엄청 작았다. 그래서 다이상 거짓말했다고 미안한 거 취소했다.
이 식당에서는 전망대에서 한 얘기보다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눴다. 즐거운 얘기는 거의 안 한 것 같다. 대부분 어두운 얘기들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집에 돌아오며 그 얘긴 하지말걸 후회하기도 했다. 영화 얘기도 했는데 내가 그냥 제일 만만한 타란티노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니 자기도 장고와 펄프픽션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근데 제일 좋아하는 건 크리스토퍼 놀란이라고 했다. 여기서도 진짜 나랑 취향이 반대구나 생각했다.
사실 어제부터 느낀 거지만 노부상이랑 나는 서로 말이 통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성향이 너무 달랐다. 대표적으로
나- 술 좋아함 / 노부- 술 못 함
나- 가끔 흡연 / 노부- 평생 비흡연
나- 인도어 / 노부- 아웃도어
나- 단 거 싫어함 / 노부- 단 거 좋아함
나- 만화 좋아함 / 노부- 만화 안 봄
나- 게을러터짐 / 노부- 바빠 죽음
나- 예민충 / 노부- 단순
등등이 있다.
정말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공통점이 거의 없는데 어떻게 서로에게 공감하며 대화를 하고있나 싶었다. 그래도 마지막엔 둘 다 구루메에 흥미없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긴 했다.
식당에서 엄청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에노시마역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는 좀 더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즐거운 이야기를 했다. 역으로 가는 길에 하늘에서 갑자기 작은 불꽃이 번쩍하고 터졌다. 그걸 보고 내가 '어! 불꽃놀이!' 했더니 저건 너무 작다고 말하길래 마츠리 중에 하는 엄청 화려한 불꽃놀이는 본 적이 없어서 보고싶다고 했더니 엄청 놀라며 그동안 일본 와서 어떻게 불꽃놀이를 못 봤냐 말했다. 그러더니 내년 여름 마츠리 기간에 내가 다시 일본에 오면 같이 불꽃놀이를 보자고 했다. 그래서 내가 일본 어디?라고 물었더니 노부상은 자기 교토에 가 본적이 없으니 교토에 가고싶다고 말했다. 내가 다음번 일본에 올 때 교토에 갈 생각이었다, 라고 하자 노부상이 엄청 놀라고 기뻐하며 나에게 내년 여름 교토에서 다시 보자고 했다. 그렇게 서로 구체적이지도 않고 불확실하지도 않은 약속을 했다.
에노시마역에서 다시 에노덴을 타고 하세역에 돌아가는 동안 서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노부상은 일 때문에 곧장 다시 치바에 돌아가야만 했고 난 그 다음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세역에서 내려 나의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다 일단 숙소에 돌아가기로 했고 노부상은 숙소 앞까지 나를 데려다줬다.
숙소 앞에서 서로 언제가 될 지 모를 다음을 기약하며 인사를 나눴다. '사요나라'라고 말 하기좀 그래서 다시 한 번 한국말로 '안녕'이라 말 했다. 그렇게 서로 어색한 악수를 한 뒤 각자 헤어졌고 노부상은 나를 뒤돌아 나가면서 작게 '寂しいね'라고 혼잣말을 했다.
나는 곧장 숙소에 들어가지 않고 마당에 몇 분을 앉아있다가 근처 편의점에서 산 맥주 한 캔과 담배 한갑을 챙겨들고 해안도로에 나가 청승을 떨었다. 한참 파도 구경을 하고 있을 때 건너편에서 아까와 같은 작은 불꽃이 하늘 위로 다시 한 번 터졌고 맥주를 마시며 그 불꽃을 감상했다.
그리고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르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가마쿠라에 온 지 3일 째다.
엊그젠 날이 너무 안 좋아 우울해 미칠 지경이었는데 전 날 신사에 가서 날씨 개게 해달라고 빈 탓인지 눈 뜨니 비도 안 오고 기가 막히게 날씨가 좋았다. 낮부터 강수 확률 90%였는데!!!!!!
내가 날씨 좋다고 너무 좋아했더니 후미에상이 신이 너를 지켜주었다며 같이 기뻐해주셨다. 후미에상은 아침을 차려 준 뒤 귀여운 선물까지 주고 곧 영어 수업이 있다며 먼저 나가셨다. 덕분에 난 빈둥빈둥거리며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집을 나왔다. 가는 길에 너무 기분이 좋아서 혼자 노래 부르고 난리를 쳤다.
숙소 체크인하기 전 시간이 좀 남아서 에노덴을 타고 이곳저곳에서 내려 산책을 했다. 가마쿠라고등학교 앞은 중국인들로 인산인해라 바로 코시고에로 넘어가 거리를 걸었다. 길에는 사람이 별로 없고 날이 좋아 바다에는 서핑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혼자 아무도 없는 주택가를 산책하는데 갑자기 좁은 골목으로 중형차 한 대가 들어와 길 가생이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그 차는 직진하지 않고 갑자기 내 옆에 멈춰섰고 차 주인이 창문을 열어 '저기..'하고 말을 걸더니 대뜸 나에게 두 시간 동안만 같이 놀자고 했다. 쓸데없이 구체적으로 '두 시간 동안만'이라고 말 하는 남자가 웃기면서도 한 편으론 정체를 알 수 없어 무섭기도 했다. 나도 마침 한가했기 때문에 마음이 0.7초 정도 흔들렸으나 그냥 같이 산책하는 거면 몰라도 처음보는 남자 차에 타는 건 오바라는 (아주 당연한)생각이 들어 거절했다. 남자는 생김새(?)로 추측하건데 근처에서 서핑하던 사람 같았다.
다시 에노덴을 타고 고쿠라지에서 내려 조금 길게 산책을 했다. 고쿠라지에 도착했을 즈음에 날이 조금 선선해지고 구름이 하나도 없는 내가 싫어하는 가을날씨가 됐는데 오히려 그곳의 풍경과 더 잘 어울려 좋았다.
체크인 시간이 되어 숙소에 갔는데 그땐 이미 태풍이 올 기세였다. 숙소 리빙룸에 노크를 했는데 주인 아주머니만 계셨다. 숙소 운영은 아들이 하고 아주머니는 같이 일을 도와주시는 것 같았다. 숙소 주인 올 때 까지 거실에 짐을 풀고 기다리면서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아주머니는 본인이 영어를 못 하니 게스트들이 놀러와도 대화를 할 수 없어 답답했는데 일본어를 할 줄 아는 내가 와서 기쁘다며 나에게 계속 말을 거셨다.
한창 아주머니와 대화하고 있는데 밖에 어떤 남자가 거실 안 쪽을 들여다 보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아주머니가 누가 왔나하고 밖에 나가셨는데 그 사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주머니가 어머 누구누구야~!하며 반갑게 누군가를 반겼다. 아까 쏜살같이 왔다 사라진 그 남자였다. 아주머니와 그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같았다.
남자가 거실로 들어오고 어쩌다보니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남자는 이 집 주인이 자신의 친구이며 가마쿠라에 오게 될 일이 있어 잠깐 들렀다고 말 했다. 아마 어릴 적에 이웃사촌 지간이었던 것 같았다. 아주머니가 한국에서 온 손님이야~라고 말 하자 남자는 내가 한국인 인 줄 몰랐다며 그때서야 알았다고 말 했다. 그때까지 내가 딱히 긴 문장을 말 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집 주인이 와서 방 배정받고 거실에 내려와 나에게 노트북으로 근처 식당같은 걸 알려줬다. 근데 자꾸만 그 남자가 '그 가게 내가 잘 아는데 좋음' '나 거기 가 봄' 하고 구라+장난을 쳐서 집주인에게 얻어맞았다. 좀 깐족대는 스타일 같았다. 구글맵으로 계속 근처 식당과 카페 사진을 보며 여기 좋아보인다~ 하는데 남자가 나에게 자꾸 '그럼 이따 거기서 봐요' 하며 까불댔다. 그리고 집 주인에게 입 좀 다물라고 쿠사리 먹었다.
근데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몇 번이고 그렇게 말 하는게 왠지 진담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남자가 나에게 곧 친구와 저녁약속이 있는데 괜찮으면 같이 가겠냐고 했다. 날이 좋으면 됐다고 했을텐데 그때 비가 주륵주륵 오고 어디 갈 곳도 없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참고로 내가 그 친구에게 실례가 될까 봐 친구에게 의향을 물어봐 달라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말 안 했다고 했다. 얘 뭐지 싶었다.
꽤 늦은 저녁이 되어서 남자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며 같이 나가자고 했다. 그 모습을 본 집주인은 놀라면서 남자에게 너 진심이었어????라고 말 하고 나를 '헐 진짜 가네'싶은 눈으로 쳐다봤다. 한 편으로 왠지 날 걱정하는 느낌도 들었는데 낮에 집 주인이 남자를 오지게 패는 모습들을 조합해 스스로 추론한 생각이었다.
남자와 숙소를 나왔는데 비바람이 세개 불어 토다이 앞에서 산 나의 빈약한 시스루 우산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남자는 나를 대신해 우산을 들어주기도 하고 비바람 피할 장소에 숨겨?주기도 했다.
남자의 친구를 만나기로 한 주차장에 갔는데 친구들은 지금 바다에서 아직 서핑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먼저 내가 차에 타 그 사람들을 기다렸다(그리고 몇 시간 전에 낯선 남자 차에 타는 건 위험해! 이지랄하던 내가 결국 낯선 남자 차에 탔다는 사실이 웃기고 어이없었다).
곧 남자의 친구 한 명이 서핑보드를 들고 물에 잔뜩 젖은 채로 왔다. 알고보니 남자도 서핑을 하는 사람이고 심지어 오늘 가마쿠라에 온 이유가 서핑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 사람들은 서핑 모임? 일?아무튼 그런 인연으로 사귄 친구들 같았다.
남자는 친구를 '다이짱'이라고 소개했다. 다이상은 스킨헤드에 덩치도 크고 좀 무섭게 생겨서 처음에 쫄았는데 귀여운 아이가 두 명이나 있는 웃기고 재밌는 건실한 가장이었다. 다이상이 합류하고 다음엔 또 다른 서퍼인 '쥰'상이 합류했다. 둘 다 바다에서 금방 나와 계속 쿳소사뮛!!!!!!!!을 외쳤다.
쥰상도 뭔가 첫인상이 무서웠는데 다이상처럼 나중에 알고보니 너의 이름은 보면서 눈물 흘리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대신에 처음에 다들 내가 오는 것을 몰라서 날 보자마자 응???하며 놀랐다. 나중에 말 하길 내가 남자의 여자친구인 줄 알았다고 했다. 터무니 없었다.
집에 들러 씻고 나온 쥰상이 다시 합류해 넷이 어찌저찌 모여 차를 타고 모츠나베를 먹으러 갔는데 전화로 예약하려니 만석이라 2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이 날 나는 후미에상이 차려 준 아침밥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 했기 때문에 너무 열받았지만 속으로만 화냈다. 결국 이곳 저곳 찾다가 후지사와에 있는 야끼토리집에 도착했다.
다이상이 나에게 못 먹는 것 있냐, 술은 마시냐 등등을 물어봤는데 내가 그 사람들 보다 술도 잘 마시고 못 먹는 것도 없었다. 그러더니 나한테 역시 한국사람들은 술이 세다고 결혼식에서 소주를 엄청 마시더라고 했는데 한국인 결혼식에 간 적이 있는건지 남한테 들은 얘기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날 일본와서 가장 크게 웃고 떠든 것 같다. 다이상은 진짜 내가 살면서 본 마이페이스+돌아이 중엔 손에 꼽을 정도라 리액션 작은 내가 물개박수까지 치면서 미친듯이 웃었다. 술 마시다 말고 자기 사진 좀 찍어달래서 찍어줬더니 갑자기 웃통을 벗어재끼면서 다시 멋지게 찍어달라하고;; 돌아이 기질이 엄청났다.
안주 시킬 때 다이상이 나에게 이거 좀 매운 건데 먹을 수 있어?라고 물어보니 쥰상이 겁나 단호하게 '?야 xx쨩 한국사람이야' 라고 말 해서 난 빵 터지고 다이상은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매운 거 전혀 못 먹는 내 입에도 그 음식은 별로 맵지 않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맵다고 난리 쳤다.
나중에 다들 취해서 텐션 업되고 나도 조금 취기가 올랐을 때 어쩌다 박그네 얘기가 나왔다가 좋은 자리에서 더러운 얘기 그만하고 싶어서 내가 적당한 때에 다이상의 고향인 아이치 얘기로 화제를 돌렸는데, 그 다음에 바로 쥰상이 다케시마 낚시하기 좋지...라고 한 뒤 한 3초 뒤에 아니!!!그 다케시마 말고!!!!!아이치에 있는 거!!!! 라고 엄청 다급하게 말 해서 나 혼자 엄청 빵 터졌다. 진짜 계속 그 표정이 안 잊혀져서 숙소 돌아와서도 혼자 실실 쪼갰다.
이야기 화제가 계속 바뀌고 어쩌다 연예인 얘기가 나왔는데 내가 스핏츠 팬이라고 했더니 다이상이 체리의 한 부분-아이시떼루 어쩌고-을 미친듯이 무한반복해서 나머지 사람들한테 시끄럽다고 욕 먹고 갑자기 엄청 크게 '헐 에그자일 타카히로랑 타케이 에미 결혼함???? 안 돼 에미짱ㅠㅠㅠㅠㅠㅠ이라 중얼대서 또 욕 먹었다.
그리고 연예인 얘기하다 내가 카세료 팬이라는말도 했는데 노부상(계속 언급 된 그 남자)이 근데 카세료도 나이 꽤 많지 않나?라고 하길래 내가 그렇다 했더니 그럼 나도 기회가 있군 이라고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했다. 올해 내가 들은 그 어떤 말 중 가장 속 보이는 말이었지만 못 들은 척 넘어갔다.
술자리가 무르익은 상태에서 다이상은 우연이 운명이 되고 어쩌고 하며 계속 나와 노부상의 사이를 엮었다. 그때 괜히 마음이 복잡해져서 대충 웃으며 넘겼더니 자꾸만 '아이 이즈 파워...!!!'를 외쳐댔는데 뻥 안치고 한 20번은 그걸 반복했다. 후카다 쿄코가 주연인 드라마 명대사라 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99년도 드라마였다; 아무튼 진짜 웃겼고 옆에 있던 가게 알바생도 혼자 웃다가 들켜서 결국 다이상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집에 가기 전 노부상이 내일 뭐 할거녜서 에노시마에 갈까 생각 중이라 했더니 자기도 가고싶다고 말 했다. 처음엔 혼자 가고싶었지만 나중엔 나도 마음이 조금 바뀌어서 갈 수 있으면 같이 가자고 말 했다. 노부상은 다음날 아침이랑 저녁에 일이 바빠서 어찌될지 모르겠다며 혼자 계속 고민하다가 결국 밤새 일 하고 치바에서 전차로 가마쿠라에 오겠다 말 했다. 그 모습을 본 다이상이 또 엄청 크게 아이이즈파워를 외쳐댔다.
이 날은 정말 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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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도쿄에서 체류 중이(었)다.
어젠 집에서부터 나리타로 와서 다시 전차로 시내까지 나오는 이동시간이 더럽게 길고 힘들어서 집에 가고 싶었는데 오늘은 반대로 더럽게 한가하고 느긋함.
지금은 도쿄에서 벗어나기 전 할 게 없어서 바바역 근처에 있는 시로쿠마 카페에 와 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바로 단 하나. 굿즈로 파는 머그컵 때문. 머그컵 컬렉터인 나에게 이것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
아놔 샹 여기까지 임시 저장해 놓고 이어서 썼는데 글 날아감!!!!!!!!!!!!!빌어처먹을 인터넷 뭐라 썼는지 기억도 안 나네 아마 이런 느낌이었을 거임 하는 느낌적 느낌으로 이어 쓴다ㅗㅗㅗ
낮에 카페에 들러 연어샌드위치를 시켰는데 재수없게도 내 주문이 주방에 안 들어가서 40분이 나 지나고 음식을 받음. 죄송하다고 음료 하나 더 줬는데 지금 생각 해 보면 20분, 아니 10분 쯤 지났을 때 가서 왜 안 나오냐 말 하면 될 것을 왜 그때까지 가만있었나 이해가 안 감. 평소에 음식 늦게 나와도 그러려니 하는 편이긴 한데 오늘은 지나치게 허기진 탓에 정신이 출타했나 봄.
카페 안은 대부분 젊은 여성들이나 아이 엄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의외로 남고생도 있고 아저씨도 있었다. 대신 다들 혼자 오고 둘이나 셋 씩 동행해서 들어오는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낮에 바바에서 출발해 바로 가마쿠라에 왔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후미에 할머니와 할머니의 따님이 살고있는 아주 멋진 가정집이다. 따님인 리카상은 바이올린 선생님이자 오케스트라로 활동하시고 후미에 할머니는 미싱사 일을 주로 하시며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음악과 산을 사랑하는 멋쟁이 어르신이다.
할머니는 산을 너무 좋아해서 20여 년전 에베레스트를 오른 경험도 있다고 하셨다. 그때 그린 에베레스트 그림과 찍은 사진들을 자랑하는 모습에서 할머니의 산 사랑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음.
과거에 할아버지와 여행 다니며 찍은 사진들을 보면 두 분 사이가 굉장히 좋았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지병을 앓고 계셨다는 이야기를 비롯해 할머니 말씀을 들어보니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지 얼마 안 된 것 같았고 할머니가 아직 그 슬픔을 간직하고 계신 것 같아 나도 괜히 슬퍼졌다.
그리고 내가 할머니께 재능이 많아서 부럽다 말했더니 할머니는 조금씩 이것 저것 할 줄 아는 사람이 원래 돈이 없다 그래서 내가 가난하다.라고 말씀 했는데 앨범에 있는 할머니의 옛 사진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듯ㅋㅋㅋㅋㅋ 무려 50여 년 전에 자녀들 바이올린, 검도 교육도 시키고 60년 전에 엄청 멋있는 차도 갖고 계셨고!!!!!! 결정적으로 집이 가마쿠라임.
어제 여기까지 쓰고 다시 잠 들어서 또 이어쓴다.
사실 어제는 날이 흐려서 너무 우울했다. 난 쌀쌀한 걸 미친듯이 싫어하기 때문에 가을이 돼 버린 서울에서 도망쳐 온 건데 감히 카나가와가 날 엿 먹이다니???싶고 여행 온 기분도 안 났다.
만약 가을이나 겨울의 중턱일 때 왔다면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상관 안 했을 테지만 내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아주 기가 막히는 타이밍에 온 탓에 쌀쌀한 날씨가 너무 적응 안 되고 외롭고 그랬음.
심지어 욕조에 쓸쓸히 몸 담구고 인간은 왜 이리도 나약한 존재인가 이딴 생각함. 예전에 아는 사람이 여행 중 우울함을 토로하길래 아무리 장기여행이어도 우울할 틈이 있나? 싶었는데 갑자기 그 마음이 너무 잘 이해됐다. 여행 중 이런 적은 처음이라 스스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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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놈과 싫은놈의 차이는 분열 된 관계 속에 자리잡은 자책의 유무에 달린 것 같음
그래서 싫은놈을 떠올리면 그 놈이 했던 시발같은 행동에 대한 기억으로 열받고 미운놈을 떠올리면 내가 했던 시발같은 행동에 대한 기억으로 괴롭다.
아무튼 이 노래만 들으면 그렇게 미운놈들이 생각남.
작년에 지산 다녀온 게 바로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2017년도 지산도 이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항상 락페 끝날 때 쯤이면 여름도 끝나는 기분이라 현실로그인을 못 하고 우울감에 빠지곤 하는데 지금은 현실로그인이고 뭐고 빨리 집가고싶다 피곤해 뒤지겠다.
빌어먹을 셔틀버스가 30분이나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눈 앞에서 심야버스를 놓치고 지금까지도 집에 도착을 못 하고 있다. 몇 시간 후 일터에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 진짜 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잠적하고 싶어짐.
최근 지산은 굳이 3일권 끊을 필요가 없어서 계속 1일권만 끊고 다니는데-사실 이것도 가기싫은데 자꾸 거슬리는 라인업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하루는 가게된다-이젠 정말 하루 만으로도 몸이 개박살난다. 앞으로 언제까지 이 짓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번엔 당연히 고릴라즈 때문에(라고 쓰고 데이먼 알반때문에 라고 읽는다)가게 됐다. 평소같으면 간 김에 이 공연도 보고 저 공연도 보고 뽕을 뽑는데 올해는 나에게 상당히 뜨뜻미지근한 라인업이 뽑혀서 거의 고릴라즈 공연에 올인하게 되었음.
얼마나 올인했냐면 시발 내가 펜스 잡고싶어서 바리케이트 존 안에서 장장 5시간을 서서 기다림. 정말 미친 것 같다. 나처럼 힘든 거 싫어하는 인간에게 5시간은 체감시간 50시간에 맞 먹는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보통은 앞 쪽 사이드나 뒷 자리를 선호하는데 이건 이례적인 일임.
그런 내가 5시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었던 건 오직 '그가 내(남)한 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불안감 때문 이었던 것 같음.
아무튼 그런 개고생의 대가로 무대 중앙 펜스 쪽에 서게 됐다. 펜스를 잡지는 못 하고 그냥 내 앞에 펜스를 잡고있는 두 사람의 틈에 껴 있는 그런대로 시야가 확보 된 아주 좋은 자리였음. 소규모 공연을 제외 했을 때 내 공연 관람 역사 상 가장 가깝고 잘 보이는 자리인 듯. 그리고 그 자리를 선택한 것은!!!!!!내가 올해 한 선택 중 제일 잘 한 선택이었음.
졸려서 내일 이어서 쓰겠다.
현실로 너무 빨리 복귀해서 어제 일이 잘 기억 안 난다. 남들이 찍어놓은 직캠보면서 아놔 내가 불과 24시간 전까지 저기 있었다니 이런 생각 중.
다만 데이먼이 펜스 중앙 쪽으로 난입?했을 때의 기억은 아주 생생하다. 왜냐면 그 바로 앞에!!!!!그리고 밑에!!!!! 내가 있었기 때문임!!!!!!!!! 왜 그렇게 팬들이 펜스에 집착하는지 와 나 음덕질 십 몇 년만에 처음 체감함. 아무리 팬이어도 라이브만 들으면 장땡이라 생각한 무지하기 짝이 없던 지난 날의 나 자신을 장마철 먼지나도록 패고싶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나는 그의 육체를 마음껏 쓰다듬고 같이 손도 잡고 본의 아니게 아밀라아제도 공유하고 아주 미치도록 데이먼 알반이라는 생명체의 존재감을 확인함. 무엇보다 그의 반짝이는 금빛 치아를 굉장히 해부학적인 시점에서 볼 수 있던 점이 인상깊었음. 그를 공연장이 아닌 다른 장소-이를테면 런던 길바닥이나 어딘가의 공항-에서 마주쳐 아주 가까이 접근할 기회가 생긴다 쳐도 절대 구경할 수 없는 장면일 거다.
이때 난 완전히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뒤에 있던 빌어먹을 청년들이 앞 쪽을 미친들이 밀어대는 통에 내장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아티스트가 관객석에 다가왔을 때 너도 나도 밀어대는 건 뭐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이번엔 좀 심각하게 질서가 없더라. ㅅㅂ혈기왕성한 새끼들
그 와중에 데이먼은 혼자 난간 올라가서 재롱 피우고 난리남. 눈을 데이먼에 고정 되어 있으면서도 몸은 밀려나는 거 버티느라 아주 환장하게 힘들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언제 끝나지..아냐 안 끝났으면 좋겠다..아 언제 끝나지...아 앙대...x100000 이 짓거리 무한반복함.
그나저나 내가 데이먼을 사랑한 가장 큰 이유 중하나인 나이를 먹어도 변치않는 young하고 순수한 모습을 이 날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댄스나 무대에 벌러덩 눕는 쌩뚱맞음이나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 안 변하고 똑같은지. country house 뮤직비디오에서 짓던 한 표정이 자꾸 오버랩되서 웃기고 좋았음.
사실 난 데이먼 알반의 팬이기 이전에 철저하게 '블러' 팬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누군가가 블러 팬이냐고 물었을 땐 오십 번 끄덕이고 고릴라즈 팬이냐고 물었을 땐 두 번 끄덕이는 태도를 보여왔지만 블러로 활동할 때의 블러 모드 데이먼에게서 느끼는 것과는 좀 다른 고릴라즈 모드 데이먼의 모습들이 좋다.
그리고 투어 멤버인 언니 오빠들 너무 쎽씨함!!!!!!!
공연 끝나고 다른 구역에서 놀고 있던 친구와 재회하자마자 "으알ㄹ락땬꺙 나 데이먼 살결도 쓰담고 막 응앙라각" 했는데 알고보니 자기는 그 상황 스크린으로 다 지켜봤다고ㅋㅋㅋㅋㅋㅋ 보자마자 "어 쟤 개털이잖아?" 했는데 애가 거의 반 미쳐있고. 문제는 내가 스크린에 계-속 나왔다고 함. 시벌탱.
이왕 이렇게 된 거 엠넷은 실황 영상을 풀어라 그거 캡쳐해서 내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쓰게 바둑판 스타일로다가.
멋쟁이 아재 데-몬.
공연 전 sns로 후지록 직캠 찾아보는데 걔들은 데이먼을 데-상이라고 부르더군. 뭔가 웃김
제프 우튼이 자기 트위터에 올린 새마을 식당 간 사진ㅋㅋㅋㅋㅋㅋㅋ
알바생이 코 앞에서 7분 김치찌개 휘리릭 뿅 퓨전하는 거 보면 눈 뒤집힐텐데?!
+
기억에 남는 몇몇 사람
1. 피카츄의 위대함에 대해 심오하게 토론하던 외국인들. 피카츄와 피츄의 차이점을 열심히 설명하던 모습이 인상깊었음.
2. 고릴라즈 공연 때 펜스 붙잡고 노엘갤러거 관련 sns글들에 하트 따발총 날리던 여성. 그녀의 휴대폰 바탕화면 또한 노엘이었다.
3. 마찬가지로 고릴라즈 공연 때 계속 "노엘!!!!!!!!! 오아시스!!!!!!!!" 외치던 남자.
존나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데 왜 하는건지 이해 안 갔음.
이왕 어그로를 끌 거면 노엘이 아니라 브렛을 외치던가.
우린 친해열.
그나저나 이 사진 지금 보니 되게 발육 좋은 초딩이랑 성장판 일찍 닫힌 삼촌이랑 찍은 것 같음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지산 1일권을 쓸 날이 다가왔으나 현재 나는 아주 개같은 상황 앞에 놓여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세 시간 전에 맥주 서 너 잔을 마시고 담배 한 대를 피운 뒤 귀가했는데 갑자기 위가 미친듯이 아프면서 구역질이 나고 어지럽다.
체한 느낌인데 담배, 맥주라는 글자만 봐도 토가 쏠리는 것이 그 두 가지가 문제인 것 같다. 하 루종일 밥을 못 먹고 술만 먹었기 때문.
안 그래도 요근래 쉰 적이 없어서 개피곤한데 과연 내가 12시간을 그 뙤약볕 아래에서 죽지않고 버틸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가서 음주가무를 시행할 수 없으면 어떡하지?
지금 속이 안 좋으면서 배도 고픈데 여지껏 지산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 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것도 걱정-지산에서 파는 음식은 맛에서도 존재이유에서도 논산훈련소 앞 식당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지금 5시가 훌쩍 넘어 잘 시간이 별로 없단 것도 아주 큰 문제ㅅㅂㅅㅂㅅㅂ
매일을 체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요즘 나에게 이것은 엄청난 시련이다!!!!!!!!!!!!!
생각이란 걸 포기한 자가 자기 목구녕까지 밥 숟가락 안 넣어준다고 "불친절한 작품이네요." 이지랄 하는 걸 보며 아 주입식 교육이 이렇게 좃같은 거구나 뼈저리게 체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