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 180713

2018. 7. 17. 18:26 from 싸돌

나하로 먼저 떠나는 홍유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숙소에 돌아갔다.
아 이게 얼마만의 휴식인가.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고팠던 나는 숙소에 가자마자 거실 소파에 퍼질러 누워 게임하고 카톡하고 과자먹고 아주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 몇 시간을 보내고 해가 지고 나서야 뭐 좀 먹으러 편의점에 갔다. 배는 고팠지만 그 주변엔 온통 술집 뿐이고 전 날 갔던 가게는 맛있었지만 면 종류는 이제 그만 먹고싶어서 가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뭘 살까 한참 고민하다 컵라면처럼 생긴 레토르트 리조또와 맥주 두 캔을 구입하고 숙소에 돌아갔다. 주방에서 컵리조또에 뜨거운 물을 부으려는데 커피포트가 작동이 안 되서 이것저것 눌러보던 중 거기서 일 하는 분? 투숙객? 어느쪽인지 모를 아저씨가 와서 아아 제가 할게요 제가! 하는 엄청난 오바액션과 함께 물 붓는 걸 도와줬다.
그 아저씨는 내가 그 게스트하우스에 처음 간 날에도 마주칠 때마다 과하게 나를 배려하는 느낌이 들어 처음엔 좀 부담스러웠다. 혼자 온 여자애가 나밖에 없어서 그런건지...
아무튼 리조또를 제조?하고 대만에서 온 워홀러 애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 중 몇 명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일 하는 애들이고 한 명은 스쿠버 다이빙 일을 한다나. 아무튼 걔들과 떠들고 있는데 그 아저씨가 또 와서 대만애에게 뭐라 속삭이며 망고가 담긴 접시를 가르켰다. 아마 나한테도 망고 좀 권하란 소리였던듯. 그 정도는 직접 말하면 되잖아????
그러던 와중 어떤 백인 남자가 내 옆에 앉았고 걔랑 떠들게 됐다. 걘 플루란 이름의 프랑스인이었는데(굳이 표기하자면 훌루에 가깝지만 편의상 플루라 쓴다. 정확히는 일본 발음의 f라고 생각하면 됨) 내가 편의점 갈 때나 건물 앞에서 담배 피울 때 몇 번 마주쳤으나 대화를 해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걔가 샐러드 퍼먹는 모습을 보고 너 채식주의자냐 물었더니 응 맞아~ 라 대답하고 바로 1초 만에 뻥이야 한국 갔을 때 갈비 엄청 먹음ㅎ 이라는 둥 이 주변에 괜찮은 식당 알려준다면서 세븐일레븐을 알려주는 둥 싱거운데 웃긴 놈이었다. 무엇보다 지가 말 해놓고 지가 허허허흐허하 하며 산타할배처럼 웃는 부분에서 대충 걔의 캐릭터성이 느껴졌다.
전날 밤 혼자 티비보면서 오하ㅏ하하하!!하고 웃던 놈이 있었는데 걔가 플루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다른 놈인듯.
내가 지금 프랑스 월드컵 결승갔는데 넌 축구 안 보냐했더니 당연히 본다면서 일본에서 월드컵 준결승 본 썰을 풀었댔다. 걘 일본인들 사이에 둘러 싸인 채 외로이 프랑스를 응원했고, 프랑스가 득점했을 때도 관종이 될 까봐 소리지르지 못 했다고 한다. 결승전도 외롭게 응원하겠지..라며 자조하는 놈을 보고 난 혼자 풉 터졌다.
- 그리고 이 일기를 쓰고 있는 시각, 프랑스는 월드컵 우승을 함. 외롭게 환호했을 모습을 상상하면 끨킐

걘 그동안 되게 심심했는지 말이 엄청 많았다. 홍대 길바닥에서 귀여운 남자애가 엄청 애교부리며 공연하는 것의 기괴함, 한국의 저렴한 소주 가격과 일본 담배 자판기 존재의 유해함, 파리 물가의 개같음, 북한 여행에 관심 없는 이유, 몽골 가서 얼어 죽을 뻔한 얘기 등 엄청 많은 이야기를 했다. 물론 나도 심심했던 차에 걔와 떠들 수 있어서 좋았다.
걘 프랑스에서 선생 일을 하다가 때려치고 여행을 다니는 중이라했다. 그때 나는 오키나와는 정녕 백수들의 집합소인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직업을 물어보면 다 노 잡이라고 하니까.
걘 나에게 한국에 또 괜찮은 지역 있냐, 돌아가면 뭐 할거냐 물었고 난 아마 군산에 갈 것 같다고 대답했다. 걘 군산이 어디냐며 자기 핸드폰에 있는 네이버 지도 어플을 켰다. 난 너 왜 네이버쓰냐 구글맵이 좋지 않냐 물었고 걘 구글맵은 너무 쓰레기라며 네이버 지도가 좋다고 했다. 나도 안 쓰는 네이버를 쓰다니.
난 아이폰 지도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데 어째서?했지만 그건 애플이고 구글은 쓰레기라며 졸라 깠다. 애플 지도는 구글 기반이 아닌가? 그렇다면 난 정말 훌륭한 지도 앱을 쓰고 있었군.
암튼 네이버 지도 별로라고 차라리 카카오 지도(난 업뎃 전 다음 지도를 쓰지만)를 쓰라고 권했지만 걘 영어 지원이 안 되서 싫다고 네이버 짱이야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카카오톡도 이상하다고 되게 까고 아무튼 네이버의 실용성을 굉장히 찬양했다.

그렇게 한 네 시간을 떠들고 난 너무 졸려서 먼저 씻고 들어갔는데 걘 새벽까지도 망부석처럼 식탁에 앉아있었다. 내가 너 안 자냐고 물으니 걘 내일 어디를 가야할지, 언제 일본을 떠나야할지 정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비행기표 금요일로 할까 월요일로 할까? 너 내일 가는 숙소는 정했냐? 거기 어디에 있는 거냐? 예약 할 수 있냐?하며 엄청 질문을 해댔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전화 예약만 가능하다고 하니 걘 엄청 고민을 하며 알겠다고 했다. 되게 웃긴 놈이라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았지만 왠지 방이 없을 것 같아서 선뜻 같이 가자고 하기 뭐 해 다음날 일어나면 한 번 문의해보라 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체크아웃 먼저 하고 쇼파에 누워 버스 시간표를 알아보는데 플루가 인사를 했다. 퀭한 얼굴로 웬 이상한 음료를 마시고 있길래 너 뭐 마셔?하니 비타민 음료라 했다. 걔가 전날 밤 잠도 설치고 몸이 안 좋아서 약을 사야겠다길래 마침 나도 진통제를 사야 해서 같이 나갔다.
플루와 약국에 들어가니 약사 아저씨가 걜 알아봤다. 그때 난 아니 얼마나 자주 왔으면 알아보지? 싶은 생각을 했다. 물론 백인이라 되게 튀겠지만.
걔가 약사에게 팔이 막 떨리고 머리가 아프고 불안해요 어쩌고 하면서 자기 증상을 설명하는 동안 약사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길래 잠을 잘 못 자는 모양이에요. 하니 그렇군요....하며 비타민을 비롯한 여러 가지 약을 추천해줬다.
플루가 약을 받고 계산하러 간 사이 난 진통제를 구입하며 약사와 대화를 나누는데 약사가 나에게 둘이 친구냐 물었다. 내가 그냥 여행 중에 만난 사이라 대답하니 약사는 아 그렇군요.........한 뒤 엄청 진지한 얼굴로 저 친구...괜찮은 건가요...? 했다. 뭔가 글로 쓰니 진지해지는데 그때 진짜 웃겼다. 약사 분의 진심어린 걱정이 느껴짐과 동시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단 사실이 너무 웃겼다. 약사 말로는 플루가 그 전날에도 몸이 안 좋다며 약을 사 갔는데 건강이 걱정된다 저러다 잘못 되는 거 아니냐며 되게 근심어린 얼굴로 물어봤다. 말투도 굉장히 조용하고 예의 바른 분이 그렇게 걱정스럽게 물어보니 웃겼다.
아프다는데 자꾸 웃기다하니 싸이코같은데...아무튼 쟨 왜 여행 와서 저러고 다니나 싶기도 하고 덩치에 안 맞게 약간 꾀병도 있는 것 같고 그 와중에 BEER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있는 것도 어이없고 여러가지 상황이 뒷받침 된 웃김이었다. 불쌍한 플루놈.......

약을 사고 나오는데 걔가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 준다길래 같이 갔다. 걘 결국 비행기 표도 숙소도 아무것도 정하지 못 한 상태였고 난 그냥 현재 있는 숙소를 연장하라고 권했다.
길을 좀 헤맨 탓에 내가 타려던 버스를 놓치고 걔는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함께 기다려줬다. 졸라 퀭한 얼굴을 보자니 불쌍해서 그냥 너 먼저 숙소로 돌아가라했지만 걘 어차피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으니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불쌍한 플루놈2.....




기사아저씨의 직업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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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개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