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이에 있는 동안 너무 마음고생을 한 탓에 방콕에 돌아오는 날 아주 마음이 가볍고 설레기까지 했다. 징글징글한 방콕의 미터 택시도 그 순간만큼은 알록달록 예쁜 꽃처럼 보이고 한 없이 즐거워 보이는 여행객들 대신 일에 치여 울상인 현지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일 정도였으니. 아무튼 아침 비행기를 타고 무사히 방콕에 도착했다. 그때만큼은 더럽고 시끄러운 방콕이 참 아름답기 그지 없었지만 결국 몸은 깐짜나부리행 롯뚜를 향하고 있었다. 아유타야나 깐짜나부리같은 동네의 좋은 점은 일단 1.방콕과 가깝고 2.여행객이 분산되어 있으며 3.관광지치고 제법 조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의미를 가진 장소들이라 그런지 마음이 좀 평온해지는 느낌도 들고. 아무튼 좋음.
다만 내가 여기서 간과한 점 하나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노인네들이 많다는 것. 그것도 그냥 노인네가 아니라 젊은 태국 여자 끼고 다니는 백인 노인네들. 이런 유형의 커플?들은 파타야 가면 제일 많이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난 파타야는 안 가봐서 모르겠고. 아무튼 요즘 깐짜나부리는 노땅들의 아지트와 다를 법 없어 보였다. 젊은 백패커들이 자주 찾는다길래 간 숙소도 이미 정년퇴임 한참 지난 노인들에게 점령당해 흡사 요양원의 분위기를 풍겼다.
내가 묵었던 숙소 옆 방에도 헤닝이라는 이름의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고 위와 같은 이유로 처음엔 경계심을 가졌으나 다행히 좋은 사람이었다. 뭐 젊은 여자 끼고 다니는 노인들도 좋은 사람일 가능성은 있으니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헤닝은 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아 나를 볼 때마다 남북관계나 한일관계 등을 물었고 본인이 여행 중 겪었던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얘기들도 많이 해주었지만 문제는 헤닝이 정말 투투투투머치토커였다는 것. 한 번 걸리면 기본 세 시간은 이야기를 들어야 했고 그럴 적마다 옆옆방 남자는 나에게 동정의 미소를 날리며 지나갈 정도였다(참고로 이 남자는 나중에 젊은 태국여자랑 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거 보고 우웩). 사실 헤닝이 나에게 그리도 집착?하게 된 계기가 있다. 헤닝을 처음 만난 날 나에게 자신의 타투를 보여주며 이게 무슨 글자인 줄 아냐고 묻길래(가타카나였다) 밥 딜런이요.라고 하자 화들짝 놀라며 '이거 읽은 사람 처음이야!!' 라고 말했다. 그리고 일본어를 읽을 줄 아냐부터 시작해 밥 딜런을 아냐, 음악을 좋아하냐 등등 엄청나게 많은 질문을 해왔고 거기에 내가 데이빗 보위나 롤링 스톤즈나 킨크스따위의 음악을 좋아했다고 밝히자 더더더더 깜짝 놀라며 '오마이갓..오마이갓...'이라고 중얼거렸다. 심지어 나에게 고맙다고까지 했다. 젊은 사람이 옛날 록음악을 좋아해주는 것이 감격스럽다고. 알고보니 헤닝은 비틀즈와 관련 된 세상 만물을 모으는 비틀즈 컬렉터이자 기타리스트이자 동시에 음악광이었다. 그 이후로 헤닝은 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표하며 나를 볼 때마다 몇 시간 씩 이야기를 했다. 기본적으로 말 하는 걸 좋아하는 분 같기는 했는데..아무튼 박찬호 저리가라였음.
반대편 방엔 젊은 예맨 남자가 묵고 그 옆방엔 독일인 중년 부부가 묵고있었는데 이 세 사람도 관계가 좀 골 때렸다. 자세히 못 들었는데 아마 미얀마 여행 중에 만나 같이 태국으로 넘어 왔다고 한 것 같다. 오토바이 하나에 셋이 올라타 사이좋게 야시장 가는 모습이 아주 인상깊은 그룹이었다. 사실 그 예맨 남자는 범상치 않은 행색 탓에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나의 호기심을 도발하였지만 좀처럼 대화할 기회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다 내가 방콕 가기 이틀 전이었나 헤닝과 테라스에서 맥주 마시고 있을 때 독일 부부와 그 남자가 우연히 쪼인하게 되었고 마침내 첫 대화가 성사되었다. 셋이 미얀마에서 만났다는 정보도 그때 입수한 것이다. 동시에 그 사람 직업이 타투이스트라는 고오급 정보도 얻어 그의 행색?에 대한 미스테리도 풀 수 있었다. 나중에 그 남자가 헤닝의 밥 딜런 타투에 관심을 보인 탓에 그 공간은 다시 투머치토커 지옥에 빠지게 되었고 나는 사람들 귀에서 피가 흐르기 직전 혼자 몰래 방으로 들어가 씻고 잤다.
여담으로 깐짜나부리를 떠나기 전 날밤 헤닝은 나에게 덴마크 놀러오면 집에 초대하겠다고 말했고 그 뒤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짐을 챙기고 나왔더니 문 앞 테이블에 헤닝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가 놓여있었고 나는 그 쪽지를 두 번 접은 뒤 지갑 속에 넣고 방콕가는 미니밴을 탔다. 이 쪽지의 여운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기고 떠난 페이스북 아이디나 인스타그램 메세지보다 더 오래갔다.
'싸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키나와2 180710 (0) | 2018.07.17 |
---|---|
옥희나와 (0) | 2018.07.10 |
끝났다아ㅏㅏ아ㅏ라라아 (0) | 2018.02.09 |
빠이빠이 (0) | 2018.02.03 |
계속 빠이 (0) | 2018.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