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친은 중산층 가정의 막내로 태어나 딱히 고생이라곤 모르고 살아 온 놈이었지만 항상 불평불만이 많았다. 게다가 그 불평불만이란 것도 세상은 날 버렸고 난 외로워 그러니 인류는 멸망해야해 이따위 중2도 쳐 안 할 것들 뿐이었다. 등 따신 놈이 더 한다고 천사같은 엄마와 넓은 집을 가진 놈이 어째 나보다 더 세상을 미워했음. 아무튼 걔의 그런 암울한 성격때문에 관계는 점점 파국에 치달았고 나중에 헤어졌다.
분명 나보다 잘 살고 집도 화목한 앤데 왜 그리 성격이 모 났나 싶었지만 뭐 누가 더 못 사는지 불행배틀 하고싶지도 않고 남의 가정사 내가 쉽게 판단할 일도 아니기 때문에 늘 대충 이해하는 척 넘어갔었다.
오늘 엄마가 10여년만에 다시 집에서 나갔다. 하지만 크게 심란하진 않았다. 10년 전과 다르게 난 가정에서 어느정도 독립적인 주체가 되었고(몸은 아니지만) 내 안타까운 사연을 들어 줄 사람도 없으며 애초에 가정사 들먹이며 자기연민에 심취할 나이는 훨씬 지났기 때문이다. 오히려 엄마가 집 나간 것보다 내가 아직도 집 안 나가고 얹혀사는 게 이상한 나이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동시에 깨달았다. 내가 구남친 행동에 공감하지 못 했던 이유는 중산층을 향한 나의 피해의식이나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이해 결여에서 온 것이 아니었음을. 걔의 과오는 그냥 지나친 자기 연민이었음을 말이다.
걘 별로 불행할 이유가 없었고 늙어서도 철이 안 들었을 뿐이었다. 나보다 잘 먹고 잘 산다는 사실에도 변함이 없다. 최소한 나는 행복하지 않은 가정을 핑계로 지구멸망따윌 꿈꾸진 않았으니까.
비교적 평온했다. 평소와 같이 내 집안의 불행을 세상을 향한 미움이나 자기파괴로 돌리지 않았다. 당연히 스스로가 불쌍하지도 않았다. 구남친과 비교하며 이 정도면 난 인간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잠깐 했지만.
그렇게 한참 거실 소파에 누워있는데 눈 앞에 시커먼 물체가 휙 지나갔다. 눈이 안 좋아서 바람에 뭐가 나뒹구나 싶었는데 그 물체가 샤샤샥하고 재빨리 또 움직였다. 아. 바선생이다.
약 한 달 전에 이 집에서 처음 바퀴를 봤다. 비록 오래되고 썩은 집이지만 그 흔한 바퀴벌레 한 번 못 보고 살았으니 아직 살 만하다는 나름의 위안을 안고 살아갔는데. 그때도 큰 바퀴는 밖에서 들어왔을 확률이 높다는 말을 듣고 혼자 행복회로 돌리고 기억에서 잊고 살아갔는데.. 그 희망은 오늘 개박살났다.
급하게 아빠 불러서 약 치고 바퀴벌레를 때려죽였다. 밖에는 비가 오고 천둥이 치고 난리였다. 그리고 거실에 앉아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집 나가고 그 집에선 바퀴벌레가 나오고. 아니 잠깐 시발 나 진짜 불행하고 가난하잖아??????????
어릴 때 부터 가난한 집=바퀴벌레 나오는 집이라는 일련의 법칙이 내 안에 있었는데 그게 우리집이 되다니. 뭔가 가난이라는 추상적 단어가 바퀴벌레라는 구체적 물질로 형상화돼 나타나 나의 못 삼을 확인사살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앞서 일어난 일과 겹쳐서 우리집, 그러니까 내 home과 house가 다 개판이란 걸 체감하니 동면하던 비참한 감정이 움찔대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 내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분리하고 가정의 콩가루력과 가난함 때문에 스스로를 어여삐여기지 않는다 자신해왔건만. 그건 아닌가 봄.
역시 인생의 트리거는 아주 사소한 곳에 있는 듯 하다.
아무튼 외나무 다리같이 불안한 집에 최대한 빌붙어 살기 자체기록 갱신중이었는데 이제 진지하게 독립에 대한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내 존재가 갈등의 원인일 수도 있잖아 진짜로.
어쩌다보니 무능력한 나의 자기반성이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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