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이에서 지난 치앙마이의 기억을 최대한 더듬으며 쓴다
밤에 숙소 샤워실이 꽉 차서 못 씻다가 1층 로비에서 떠드는 일본인 여자와 중국 여자애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땐 아직 일본인 여자와 어색해지기 전이었다. 중국 여자애는 가끔 복도에서 마주칠 때 인사만 하다가 그날 처음 대화를 나눠봤다. 근데 나도 영어를 정말 못 하지만 그 애들은 나보다 더 못 했고 어쩔 수 없이 번역기를 뚜드리며 간신히 의사소통을 했다. 재밌는 건 걔들이 번역기에 중국어를 작성하고 그것을 영어로 번역->나에게 구두로 들려주는?작업을 거쳤는데 당최 걔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글을 보여달라했더니 완강히 거부하고 자긴 꼭 말로 하겠다며 천천히 잘 들어보라고 했다. 말은 더럽게 안 통했지만 귀엽고 웃겼다.
한참 얘기할 때 걔들 친구 한 명이 또 숙소로 들아와서 나보고 자긴 한국을 너무 좋아한다며 이종석과 이광수를 좋아한다고 어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연예계에 관심없는 나는 다시 한 번 짜게식었다.
방에 한국인 여자애가 한 명 왔었는데 얜 사람과의 대화를 극히 피했다. 걘 하룻밤 자고 다른 데로 가버렸다.
다음날 그 여자애가 떠난 자리에 키가 겁나게 큰 남자가 들어왔다. 걘 방에 들어와서 쭈뼛거리다가 나에게 에어컨 켜는 법을 물어봤다. 모르겠다하고 일본인 여자에게 물어봤더니 그 사람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더니 어색하게 아..그래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놈 이름은 마르셀(통칭 맛세)였고 독일사람이었다. 태국엔 정말 독일인이 많다. 처음에 자기 이름을 맛세이라고 소개하길래 거 이름 한 번 특이하네 라고 생각했는데 마르셀의 독일 발음인 마르셀을 겁나 독일스럽게 발음해서 대충 마르셀->맑셀->맛세라고 들린 거였다. 아무튼 난 그 애를 계속 맛세라고 불렀고 앞으로도 맛세라고 적을 것이다.
걘 누가 독일인 아니랄까봐 겁나 재미가 없었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허접한 내 영어실력을 최대한 동원해 말을 걸어도 걘 항상 아..오케이..로 대화를 끝냈다. 얜 여행까지 와서 아침마다 명상을 한 뒤 채소주스를 마시고 헬스를 하는 정말 매사에 진지하고 바른애였고 심지어 비건이었다. 채식주의는 정말 어려운 일이고 난 그들을 존중하지만 걔가 비건이라하니 정말 완전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 놈이 오늘 내일 뭐 할거냐고 묻길래 아무 계획이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심심하면 내일 같이 선데이마켓에 구경가자고 했다. 근데 그 말조차 정말 건조하고 아무 표정없이 했다. 난 일단 알았다고 했지만 한 편으론 걱정이 앞섰다. 난 타지에 나가면 아무도 날 모른다는 이점을 이용해 아무에게나 말을 걸며 아주 나대고 다니지만, 걔랑은 무슨 말을 해도 어색했다. 같이 잘 다닐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그래서 그날 밤 로비에서 컴퓨터하던 일본인 남성 코헤이에게 쪼인을 권유했다. 다행히? 코헤이가 오케이했고 그 김에 둘이 많은 대화를 나눴다. 코헤이는 전날 밤 술집에서 지갑 속 돈을 누가 몽땅 훔쳐가 풀이 죽어있었다. 나는 그래도 몸 성한 게 어디냐 돈 잃는 건 최악이 아니다 라며 아주 상투적인 위로를 했다. 코헤이는 야돔을 겁나 사랑하는 인간이었다. 걘 야돔을 10개나 가지고 다녔고 가방에 걸 수 있는 고리형도 보여주겠다며 가방을 뒤졌지만 잃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도둑이 돈이랑 같이 쌤쳤나보네 ㅋ하고 놀렸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맛세, 코헤이와 5시에 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는 침대에 누워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일본인 여자가 방을 옮긴 게 바로 그 날이었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이름은 츄챠우(통칭 챠우)였고 중국인인데 나와 동갑이었다. 그 애는 내가 만나 본 중국인 중 가장 영어를 잘 했고 말투도 상당히 똑부러졌다. 성격도 굉장히 적극적이라 그 애가 오자마자 엄청 많은 말을 했는데, 걘 너무 말이 빠르고 그 애에 비해 내 영어실력은 너무 발이라 계속 어? 뭐라고?뭐라고?를 반복해야 했다. 챠우는 치앙마이에 놀러 온 자기 중국친구를 만나야 하는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고, 나와 동행이 같이 선데이마켓에 가자고 권유했다. 다행히 챠우가 알았다고 해서 어색함에 대한 나의 두려움은 사라졌다.
결국 이 날 룸메이트 모두가 선데이마켓에 함께 갔고 아주 재미있는 하루를 보냈다. 중간에 일행들끼리 길을 잃을 땐 뒤 돌아 맛세를 찾으면 됐다. 걔는 키가 무려 2미터였고 덕분에 등대역할을 아주 톡톡히 해주었다. 중간에 챠우가 우유사탕을 사서 우리에게 나눠줬고 그걸 코헤이가 다시 맛세에서 나눠줘서 한 입에 털어넣었는데, 내가 '그거 우유인데 너 먹어도 돼?' 했더니 인상 개 팍 쓰고 뱉은 뒤 풀숲으로 던져버렸다. 그러고선 갑자기 수줍게 웃으며 '그래도 고마워'라고 말했다. 그거 보고 진짜 웃겨죽는 줄 알았다. 그 순간 맛세란 인간이 너무 좋아졌다. 해맑은 자식.
근데 챠우는 처음엔 코헤이를 썩 내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면 코헤이 걘 자기 나라를 너무 사랑했고 일본문화에 대한 프라이드도 엄청 강했다. 어느정도냐면 유카타를 입고 밖에 싸돌아다녀 상인들의 어그로를 온 몸으로 흡수하고, 거기 노점에서 파는 초밥은 짝퉁이라며 자긴 절대 안 먹겠다고 손사레를 쳤다. 일본짱짱맨 마인드가 몸에 배어있었다. 사실 잘 모르겠다. 자국민이 자기 나라 사랑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여행지에서 만난 일본인 중 몇몇은 굳이 타국에서 자기 문화의 우월함을 알리려는 무리수를 보였다. 물론 다양한 문화의 교류는 중요하고 재미있는 일이며 또 그것이 여행의 묘미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르겠다. 그 애는 일본인이고, 나와 챠우는 그 나라가 일으킨 전범 행위와 학살을 겪었던 나라의 사람이다. 그리고 일본은 그에 대한 역사 청산을 아직도 하지 않은 나라이다. 그런 상태에서 일본은 세계최고 일본은 가장 아름다운 나라 일본은 깨끗한 나라!라고 강조하는 것이 내 입장에선 썩 유쾌하지 않았다. 내가 챠우 입장까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처음엔 챠우도 그런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 같아 보였다. 어쨌든 나중엔 다들 친해게 지냈지만 그땐 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아무튼 룸메들과 길바닥에서 음식도 사 먹고 음식도 사 먹고 음식도 사 먹으며 재미있게 놀고 타패에 갔는데 맛세가 빛을 내며 고무줄로 튕기면 하늘로 날아가는..여의도에 많이 파는 이름 모를 장난감을 사서 지 혼자 정신없이 튕겨댔다. 우리가 맥주 마시자고 불러댔는데도 걘 장난감에 빠져서 그것만 몇 십분을 갖고 놀았다. 결국 기린같이 큰 애를 펍에 질질 끌고 갔고 거기서 맥주를 마셨다. 맛세는 레이디보이에게 인기가 많았다. 코헤이는 콧구멍에 야돔을 끼고 쌩쑈를 했다. 아주 재미있었다.
맥주를 다 마시고 근처 술집으로 2차를 가자며 나왔는데, 맛세가 자꾸 딴 길로 샜다. 걘 자기가 가고싶은 바가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거기 안 가면 바로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거기서 난 괜한 천사병이 돋아서 일행들을 불러 맛세가 가고싶어하는 바에 가자고 말했고 다들 오케이했다. 근데 걔가 말 한 술집은 정말 더럽게 멀었고 가는 길도 복잡했다. 한 30분은 넘게 헤맸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한 일행들이 점점 지쳐갈 때 걔가 말 한 술집이 드디어 나왔다. 그리고 나와 맛세가 먼저 그 술집 입구로 다가갔는데 문지기같은 사람이 갑자기 우리에게 여권을 내놓으라고 했다. 알고보니 거긴 평범한 술집이 아니라 무슨 테크노클럽? 같은 데였다. 맛세는 무거운 블루투스 스피커를 들고다니며 아침마다 테크노음악을 듣는 테크노 빠돌이였다. 우린 모두 거길 들어가고 싶지 않아했지만 맛세는 거길 가고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상의 끝에 그 앞에서 호스텔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과 클럽 가고싶은 사람끼리 찢어지자고 했으나 맛세는 또 그건 원하지 않는다고 해 결국 다들 호스텔로 돌아갔다. 걘 매우 아쉬워했다. 그냥 그 앞에서 맥주나 마시고 들어갔어야했는데 나의 괜한 오지랖으로 마무리가 흐지부지해졌다.
돌아가는 길에 맛세가 계속 배고프다고 찡얼대서 호스텔 근처에 있는 유일하게 문을 연 식당에 들어가 팟타이를 시켰다. 그리고 그 팟타이는 이후 우리의 핫플레이스가 되었고 나는 한국어와 영어와 일본어의 카오스 사이에서 완벽한 0개 국어를 실현했다고 한다.